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릴 열도 분쟁 (문단 편집) == 다른 패전국들과의 비교 == 일부 국제 전문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폴란드]], [[러시아]], [[리투아니아]]에 넘어간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포메른]] 등 구 동방 영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한 [[독일]]처럼, 일본도 [[독도]]와 쿠릴 열도 4개 섬의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전향적인 태도로 선회해 그 반대급부를 취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주장한다. 어차피 러시아의 실효 지배가 오래되었고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손잡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이었음을 감안하면, 일본이 영유권 주장은 국제사회의 공감을 사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쿠릴 열도나 독도와 같이 극히 작은 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효과도 없고, 획득하더라도 국력 향상에 별 영향도 없을 뿐더러, 주변국의 반감만 살 뿐이라 국제사회 내 일본의 운신의 폭을 제한할 뿐이다. 일본과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상황을 비교할 때 전쟁을 일으킨 과거사에 대한 반성 태도 및 전범 청산 문제가 주로 논의되지 과거 영토에 대한 일본과 독일의 태도 차이를 비교하는 경우는 적다. 하지만 최근에는 독도와 쿠릴 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과거사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일본 정부를 옛 영토를 완전히 포기하고 주변국과의 분쟁을 제거하며 역내 협력을 도모하는 독일 정부와 비교하며 비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독일이 과거 영토를 영구히 포기한 결단은 일본보다 훨씬 어려웠는데 근대 팽창 과정에서 점령했던 오지에 불과한 독도, 쿠릴 열도와 달리 독일이 상실한 동방 영토는 중세 [[동방식민운동]] 이래 독일인이 생활한 역사 깊은 본토인 동시에 1,000만 명이 넘는 독일인들이 거주하던 고향으로 그 무게감이 달랐기 때문이다. 일례로 동프로이센의 주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는 1255년 독일 기사단의 첫 정착을 도시의 기원으로 하며 구 [[프로이센 공국]]의 고도(古都)이자 인류의 지성 [[임마누엘 칸트]] 철학의 요람이었던 만큼 당대 독일인들에게 상징적인 도시였다. 또한 슐레지엔은 광업과 공업 등 산업이 발달하여 전전 독일의 주요 경제 지역이었고, 주도 [[브레슬라우]](현 폴란드 브로츠와프)는 전전 독일 내에서 10위 안에 드는 대도시였다. 그리고 [[포메른]]의 주도 [[슈테틴]](현 폴란드 슈체친)은 1181년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된 이래 800년 가까이 독일계 인구가 거주하던 도시였으며[* 법적으로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은 바 있으나 이때에도 여전히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었으며 주민들 역시 대다수 독일계였다.] 전통적으로도 수도 [[베를린]]의 [[외항]]이었다. 이렇듯 독일이 상실한 동방 영토는 12~13세기에 독일화가 진행되었고 중세 이래 독일사의 주요 무대가 된 역사 깊은 지역이다.[* 독일이 상실한 지역을 일본과 비교하면 일본은 이미 11세기 후반에 혼슈 최북단인 아오모리를 점유했으나 14세기 무렵에야 홋카이도 최남단인 오시마 반도에 진출했다. 그리고 17세기 후반까지 소야, 앗케시 등 홋카이도 최북단에 장소(대 아이누 교역 창구), 어장 등 일본인 거점이 세워지며 비로소 홋카이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남사할린과 남쿠릴 열도에도 17세기 후반부터 진출하기 시작했다. 즉, 독일의 사례를 일본에 비유하면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는 물론 홋카이도 전역을 소련에 빼앗기고 도호쿠와 간토 지방에는 공산정권이 들어서며 수도인 도쿄가 미소 진영으로 양분된 격이다. 물론 이는 참고용 비유일 뿐 양 전선 내 소련의 기여도가 다르고 독일과 달리 일본은 소련에 선공당한 입장이며 동유럽은 독일, 러시아 외에도 많은 나라들의 역사적 클레임 및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기계적으로 동일시하긴 곤란하다.] 반면, 일본이 소위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는 쿠릴 열도 남부의 경우 17세기 중반에야 일본인들이 그 존재를 인지했고, 18세기에 들어서 에토로후(이투루프), 구나시리(쿠나시르)에 일본인들이 정착했으며, 전전 인구 규모 역시 고작 17,000명에 불과했다.[* 에토로후의 경우 딱 한번 일본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곳이 바로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해군 함대의 출항기지였다.] 물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에서 볼 수 있듯 구 동방 영토가 [[엘베 강]] 서부와 같이 역사적으로 독일계의 배타적인 영역이었던 것은 아니고 특히 상부 슐레지엔의 경우 더더욱 그렇지만 쿠릴 열도와 역사성을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일본이 쿠릴 열도를 상실한 원인인 2차 대전 자체가 본래 추축국이 다른 국가의 영토를 빼앗기 위한 침략 전쟁이었다. 결국 명시적인 규칙은 없었더라도 추축국이 전쟁을 일으킨 시점에서 그들은 패전 시 그들의 영토를 상실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타국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 벌인 전쟁에서 패한 결과 자국 영토의 일부를 빼앗긴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로 비쳐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쿠릴 열도가 비교적 근래인 18~19세기에 확보한 영토가 아니라 오랫동안 일본의 영토였을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실제 독일이 범게르만 지역인 [[주데텐란트]], [[오스트리아]], 동유럽의 독일계 커뮤니티 뿐만 아니라 중세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영유했던 구 동부령을 그렇게 잃었다. 쿠릴 열도 분쟁은 [[난징 대학살]], [[위안부 문제]] 등 구 일제의 전쟁범죄와 더불어 일본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방해하는 문제인데 이는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을 문제 삼아 일본의 상임이사국 가입에 대해 강경하게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가 상임이사국에서 물러나지 않는 한 일본은 쿠릴 열도 반환과 상임이사국 진출 가능성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다만 쿠릴 열도의 영유권 주장을 일본이 포기한다 하더라도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이 유력해지는건 아닌게 [[센카쿠 열도]]를 비롯한 또 다른 상임이사국 [[중국]]과의 영토 분쟁은 물론 일본의 과거사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며 지정학적인 이유로 일본의 상임이사국화를 반대하는 국가들도 많기 때문이다. 일본보다 과거사에 전향적인 독일은 물론 아예 과거사 문제가 없는 인도조차 상임이사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형편이다. 단, 인도는 중국, 파키스탄과 카슈미르 분쟁이 있다.] 이는 현재 러시아가 일본과 같은 제2차 세계 대전 추축국 출신인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현재 독일은 패전 후 러시아, 폴란드 등 주변국에 넘어간 구 동방 영토의 영유권 주장도 포기한 상태이다.[* 물론 독일이 패전 직후 바로 고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동독]]의 경우 그 태생이 소련의 위성국인지라 건국 직후 바로 오데르-나이세 선에 합의한 반면 [[서독]]은 1960년대까지 동방 영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이어나갔고 [[빌리 브란트]] 이후에도 영토 문제를 대놓고 제기하진 않았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통일 시점까지 현 독폴 국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구 연합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에 서독 정부와 그를 승계한 통일 독일 정부는 상실한 고토에 대한 모든 영유권 주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작금의 현실에서도 독일은 일방적으로 영미의 편을 들지 않고 종종 [[미러관계]] 긴장을 중간에서 조율할 만큼 [[독러관계]]는 양호하다. 하지만 러일 양국은 당장 영토 문제가 걸린 관계이기에 항상 긴장이 흐른다. 이러한 이유로 G4의 상임이사국 진출 여부가 주요 안건으로 올라올 때마다 러시아는 독일에 대해서는 표면적으로 문제삼진 않으나 일본에 대해서는 중국과 연합해 노골적으로 반대한다. 2차 대전 당시 소련의 주적이었던 독일과 달리 일본은 딱히 러시아인들의 원한을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러한 지경이니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얼마나 대외관계를 악화시키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추축국 중 연합국과 교전한 기간이 가장 짧고 전쟁범죄도 비교적 적은 이탈리아조차 2차 대전 이후 영토 상실을 감수했다.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와 에게 해의 식민지 상실은 물론이고 동북부 [[이스트리아 반도]] 일대와 [[달마티아]]의 [[자다르|차라]](현 [[크로아티아]] 자다르), [[풀라(도시)|폴라]](현 크로아티아 풀라)를 [[유고슬라비아]]에 넘겼으며 국경 지역의 몇몇 마을들도 주민투표에 따라 프랑스에 할양했다. 이 지역들 역시 이탈리아에 결코 덜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는데 특히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 일대는 고대 로마와 중세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은 바 있다.[* 참고로 이탈리아는 2차 대전 과정에서 프랑스에게 빼앗은 [[사보이아]]도 도로 빼앗겼는데 이곳 역시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사보이아 왕가의 본향으로서 의미가 남다른 지역이었다. 다만 사보이아의 경우 19세기 중반 프랑스에 넘겼다가 2차 대전으로 재탈환한 것을 도로 빼앗긴 것이기 때문에 이 예시에 적합하진 않다.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의 경우에도 1차 대전 이전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것을 승전 보상으로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2차 대전 패전 이후에는 그곳을 사수할 명분이 약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사보이아는 이탈리아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토이며 이스트리아의 경우에도 고중세부터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발칸 국가들이 번갈아 차지하던 영토인지라 18~19세기 이후에야 진출한 쿠릴에 비해 법적 연고권은 떨어지지만 역사적 연고권만큼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탈리아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빼앗긴 영토에 대해 반환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 패전국의 영토 상실은 비단 2차 대전 추축국에 한정된 단죄가 아니다. 엄연히 추축국과 별개 세력이었던 [[핀란드]]도 소련과의 전쟁에서 패한 결과 제2도시 [[비푸리]](현 러시아 비보르크)를 포함한 [[카리알라]](카렐리야), [[페차모]](페첸가) 등지를 토해냈고 일방적 피해자였던 폴란드 역시 독일 동부를 보상격으로 받았지만 정작 소련에 선제 침공당한 폴란드 동부는 그대로 빼앗겼으며 [[체코슬로바키아]]도 [[루테니아]] 지방을 잃었다. 또한 추축국의 협력국이었던 [[헝가리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도 전후 많은 영토를 소련에 할양했다. 1차 대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동맹국 진영이었던 [[독일 제국]]은 [[포젠]]과 [[서프로이센]]을 상실했으며 [[단치히 회랑]]을 통한 국토 단절을 감수했다.[* 참고로 일본은 1차 대전의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패전국 독일 영토 분할에 참가했는데 [[독일령 뉴기니]]의 일부를 전리품으로 획득해 [[남양 군도]]로 편성했으며 일시적으로 독일령 칭다오도 점령했다.] 또한 다른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더욱 가혹한 운명을 맞았는데 소수 민족을 모조리 독립시키며 제국을 해체하는 수모를 겪었다. 한편 중국은 19세기 서구 열강들과의 전쟁에서 패한 결과 본토에 [[홍콩]]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조계지, 조차지가 건설되는 것을 목도하고 [[연해주]]를 러시아에 할양했으며 프랑스는 [[보불 전쟁]]의 패전으로 [[알자스-로렌]]을 독일에 빼앗겼다가 1차 대전 승전으로 이를 도로 되찾았다. [[멕시코]], [[파라과이]], [[볼리비아]]도 각각 [[미국-멕시코 전쟁]], [[삼국동맹전쟁]], [[태평양 전쟁(남아메리카)|남미판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며 많은 영토를 상실했다. 심지어 일본 자국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전의 결과 [[대만 섬]]과 [[사할린]]의 절반을 청나라와 러시아로부터 빼앗은 전적이 있고 1차 대전 승전의 대가로 독일령 칭다오 및 뉴기니를 차지했고, 반대로 [[태평양 전쟁]] 패전의 결과 [[류큐 제도]]와 [[오가사와라 제도]]의 영유권을 오랫동안 미국에 빼앗겼던 바 있다. 전후 쿠릴 열도의 상실 또한 2차 대전 당시 일제의 악행에 대한 단죄라기보다는 승전국에 대한 보상 성격에 가까우며 이는 인류사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단, 독일과 일본의 대러 입장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는 있다. [[폴란드 침공]]과 [[독소전쟁]]을 일으켜 600만 명의 폴란드인들과 2,600만 명의 소련인들을 살해하고 동유럽 인구의 약 15~20%를 증발시킨 독일과 달리 일본은 사할린과 쿠릴 분쟁을 시작으로 [[삼국간섭]], [[러일전쟁]], [[시베리아 출병]], [[할힌골 전투]] 등 러시아와 갈등의 역사는 많았지만, 러시아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벌인 바가 없다. 즉, 영토 할양의 대상인 폴란드와 러시아에 마음의 빚이 있는 독일과 달리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마음의 빚이 전혀 없다. 오히려 [[독소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독일과 달리 일본은 소일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당한 입장이다. 물론 일제의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대한민국]]을 상대로도 영토 분쟁을 벌이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2차 대전에 대한 일본의 부채 의식 또한 독일과 상이한 것은 분명하며 그렇기에 이러한 주장조차도 다분히 핑계성으로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해당 분쟁에 한정하면 분명 독일과 일본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실제 일부 일본인들이 일제가 침략한 타국에 대해서는 일본이 가해자라고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러시아에 한해서만큼은 소련에 기습적으로 침공당한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전후 일본인들의 피해자 인식 형성에 공습과 원폭 못지 않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 소련의 불가침 조약 파기와 기습 침공이었다.] 또한 상술했듯 독일도 어디까지나 동서 통일이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기한 것이지 통일 이전 서독 정부는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단, 서독이 통일 이전까지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고토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과 별개로 [[빌리 브란트]] 총리의 폴란드 방문과 사과 이후 작금의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 [[북방 영토의 날]]을 만들었듯 주변국을 상대로 영토 관련 선시비를 걸며 굳이 외교분쟁을 만들지 않았으며 반대로 일본은 명백한 피해자 입장인 한국에 대해서도 독도와 관련해 추태를 부리는 중이다.] 반면, 미국에 일방으로 점령되며 분단을 면한 일본은 분단된 독일과 달리 소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역사적 영유 기간과 별개로 해당 국가들의 역사적 연고권 양상 역시 어느 정도 다르다. 동방 영토가 독일령이었던 역사가 남쿠릴 열도가 일본령이었던 역사보다는 길지만 동방 영토의 경우 독일 뿐만 아니라 폴란드, 보헤미아(체코) 등 슬라브계 주변국들도 역사적 지분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독폴 국경 끝자락인 [[슈체친]](독일명 슈테틴)은 12세기부터 독일령이었으나 그 이전에는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영토였고 실롱스크(독일명 슐레지엔)는 16세기까지 폴란드와 보헤미아가 번갈아 지배했으며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 왕국은 1740년에야 오스트리아로부터 이 지역을 차지했다.[* 참고로 슐레지엔은 16~18세기 동안 합스부르크의 영토였는데 이들이 독일계라 하더라도 오스트리아가 독립국인 현실에서 이 시기를 독일의 역사적 지분으로 보기 어렵다.] 또한 구 [[동프로이센]] 주 지역은 17세기까지 법적으로 폴란드의 봉신국이었으며 [[그단스크]](독일명 단치히)는 근대인 18세기 말 폴란드 멸망 시점까지 폴란드령이었다. 이런 연유로 폴란드에서도 새로 차지한 구 독일령을 [[https://en.m.wikipedia.org/wiki/Recovered_Territories|'수복령(Recovered Territories)']]이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남쿠릴 열도의 경우 1945년 이전 역사에 대해 러시아의 역사적 지분이 거의 없고 선주민인 아이누는 슬라브와 달리 정치체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 단위로 이 지역을 온전히 점유한 나라는 일본 뿐이었다.[* 상술했듯 그나마 이투루프는 18세기 중반에 러시아인이 먼저 개척했으나 18세기 후반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러시아인들을 축출한 역사가 있기에 러시아도 역사적 지분이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일부 러시아인의 비공식적인 진출이었을 뿐, 중앙정부 차원에서 선점한 적이 없고 오히려 1855년 수교 과정에서 러시아 중앙정부가 일본령으로 인정한 전적이 있으므로 강한 클레임을 가지지는 못한다. 그리고 쿠나시르 이남 3개 섬은 상술했듯 줄곧 일본의 영향권이었다. 일례로 쿠니시르의 경우 일본사의 사건인 [[쿠나시르 메나시 전투]](1789)의 배경이며 19세기 초 [[에도 막부]]가 편찬한 [[https://ja.m.wikipedia.org/wiki/%E5%A4%A7%E6%97%A5%E6%9C%AC%E6%B2%BF%E6%B5%B7%E8%BC%BF%E5%9C%B0%E5%85%A8%E5%9B%B3|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図)]]도 쿠나시르 섬을 일본령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1811년에는 러시아인 탐험가 바실리 골로브닌(1776~1831)이 쿠나시르 섬에 입항했다가 쇄국 정책을 내세운 막부에 붙잡혀 2년 동안 억류당한 [[https://en.m.wikipedia.org/wiki/Golovnin_Incident|골로브닌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역시 19세기 초에 쿠나시르가 일본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일본이 남쿠릴을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정리하면 일본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죄책감이 전혀 없고, 정치적으로 러시아에 굽힐 이유도 없으며, 해당 지역에 대한 영유 기간은 짧아도 역사적 클레임은 확고한 편이다. 게다가 국제사회의 주도 세력인 미국과 유럽연합이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고 한때는 중국도 일본을 적극 지지했으니 명분마저 어느 정도 확보한 상황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로서도 영유권 주장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아무튼 이렇게 긴 분쟁의 세월 동안 쿠릴 열도는 실질적으로 러시아의 영토로 굳어졌고, 그 땅에 사는 주민들의 절대다수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계통의 슬라브인이며 그들은 당연히 모국인 러시아 잔류를 희망한다.[* 다만 본래 남쿠릴 열도의 원주민들은 일본인에 동화되었고 이들은 2차 대전 이후 이주한 슬라브 주민들이다.] 한편, 본래 선주민이었던 아이누들은 대부분 일본군을 따라 [[히키아게샤|인양되었고]], 잔류하려는 자들도 대부분 소련에 의해 추방되었으며 현재는 일본인들과의 통혼으로 혈통이 희미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누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도 홋카이도 본토 아이누의 정체성에 동화되었다. 따라서 본래 이 문제에서 누구보다 중요해야 할 이들은 안타깝게도 전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